1988년 평택 사업가 유인흥은 장학기금을 모아 장학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재)평택대학교인흥장학재단의 시작입니다.

■ 평택 갑부로 불리었음에도 아버지 생활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겸손했습니다. 옷치레, 음식치레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늘 검소한 차림에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습니다. 아버지 유인흥의 정직함, 근면 성실, 근검 절약은 일대에서 유명했습니다.       |   (재)평택대학교인흥장학재단 이사장 유재호  |



설립자 유인흥

유인흥 (재)평택대학교인흥장학재단 설립자



아버지는 1918년 경기도 평택시 서정 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성실하다고 주위의 평판이 좋았습니다. 어느 날 마을 정미소에 놀러갔을 때, 정미소 주인이 아버지에게 뭘 물어보았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도 빠르게 셈을 하여 대답했습니다. 이때 정미소 주인은 아버지가 남다른 능력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정미소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어릴 때 정미소에서 일한 첫 직업 경험은 아버지가 성인이 된 후, 방앗간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옛날에는, 특히 송탄과 같은 지방에서는 1차 산업인 농업 외에는 할 일이 마땅치 않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환경 탓에 아버지도 작은 방앗간을 경영하는 데서부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시작은 작은 방앗간이었으나 이 방앗간을 토대로 아버지는 훗날 사업을 크게 일구게 됩니다.

두 분은 일찍 결혼했는데 이는 일제시대에 일본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꼼꼼하고 치밀한 사고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관대하고 넉넉한 품성을 가지셨습니다. 아버지와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어머니는 평생 동안 성실하고 든든하게 아버지를 도운 조력자였습니다. 정미소에는 따로 직원을 두긴 했지만 어머니는 정미소를 당신 자리로 여기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직접 장을 보시고 장과 김치 담그는 큰일들은 손수 했습니다. 장을 볼 때는 물건값을 깎는 일없이 제 가격대로 샀고, 한 곳에서 한꺼번에 물건을 사지 않고 여러 가게에서 골고루 물건을 사곤 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나눠먹고 살자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6.25전쟁 이후에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여럿 시작하게 됩니다. 전쟁 당시 마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습니다. 집이 없어지고 마을과 농토는 폐허가 됐습니다. 먹을 식량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 겨울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후 군에 자원 입대했던 아버지가 돌아와 폐허가 된 마을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서정 리와 평택, 2군데에 옹기 공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공장을 모두 사들였습니다. 집집마다 전쟁통에 살림살이가 모두 말이 아니던 때였습니다. 그릇은 생활필수품이었기에 공장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구워낸 그릇이 식기도 전에 팔려갈 정도로 대박 장사였습니다.

그릇 장사로 현금이 쌓여가자 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전환하였습니다. 그릇 생산 다음으로 하신 일은 비료 사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농사를 다시 짓기 시작하면서 부족했던 것이 바로 비료였습니다. 아버지는 선하고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당시엔 농사는 지어야 하는데 비료를 살 돈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돈 없다 내치지 않았습니다. 비료 값을 장부에 달아놓고 일단 비료를 내주었습니다. 그들은 무척 고마워 했고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에 이자까지 쳐서 쌀로 되갚았습니다. 이렇게 신용을 얻으면서 사업을 해나가자 비료장사로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옛날 농업사회에서 농사짓는 것 외에 별다른 궁리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보통 사람들이 가졌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늘 보통 사람들 보다 몇 수 앞서갔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가진 정미소 운영방식은 마을의 작은 방앗간 시절부터 철두철미했습니다. 일년 365일 쉬는 날도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방앗간은 경기도 일대에서 유인흥 씨 댁 방앗간이 유일했습니다. 언제 가든지 떡을 찧고 고추를 빻을 수 있어서 손님들이 크게 신뢰하는 방앗간이었습니다. 두 분이 근면 성실로 일구어낸 방앗간은 규모가 커져 정부미 도정공장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일하는 정부미 도정 사업은 생산량도 많았고, 수입이 일정하게 보장되는 탄탄한 사업 아이템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맨땅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입니다.
일본 식민지인으로 태어나 전쟁으로 삶의 기반이 파괴된 한국에서 청년기를 보냈던 세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던 내 아버지 유인흥은 그렇게 평택의 부호로 성장해갔습니다.

유인흥 (재)평택대학교인흥장학재단 설립자



유인흥의 정직함, 근면 성실, 근검 절약은 일대에서 유명했습니다.
평택 갑부로 불리었음에도 아버지 생활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겸손했습니다. 옷치레, 음식치레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늘 검소한 차림에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무엇을 하겠다 하면 앞만 보고 가는 분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양화점, 간장공장, 고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들을 벌였고 거의 모든 사업에서 성공했습니다.

위대한 유산 (재)평택대학교인흥장학재단.
적은 돈이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이 절약하던 분이었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큰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일군 위대한 사업 중 하나가 장학기금을 마련입니다. 장학사업은 다음 세대를 위한 명확한 투자였습니다. 장학사업은 아버지가 가진 ‘돈의 철학’입니다. 이렇게 돈을 쓰는 것이 세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이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1988년 아버지는 자신이 보유한 땅 중에서 가장 큰 땅을 팔아 장학기금을 마련해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장학사업은 아들인 내가 이어갔고 또 딸에게로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후에도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집안의 전통으로 삼아 이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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